[영화]비스트, 씩씩한 소녀들의 계보를 잇는 허쉬파피

이 세상은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생명체

신숙희 기자 컬처리뷰 송고시간 2013/02/06 00:00:00 최종 업데이트 2013/02/06 00:00:00

1.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

짧은 빨강머리를 양쪽으로 땋았는데 그 머리의 양쪽 끝은 하늘을 향해 뻗쳐 있다. 헐렁한 원피스에 긴 양말을 신었는데 양쪽이 무늬가 다르다.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하고 눈엔 장난기가 가득하고 코는 조그맣고 입매가 야무지다. 자, 이 정도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삐삐는 스웨덴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여사의 동화책 [삐삐롱스타킹]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삐삐는 자신이 키우는 말도 번쩍 들어 올리는 엄청난 힘과 금화가 가득 든 가방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유머와 상상력이 이 소녀의 재능이다. 삐삐가 살고 있는 집 또한 뒤죽박죽 별장. 정리되지 않은 것 같지만 뒤죽박죽 별장 속에는 소녀만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과 상상력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놀라운 힘이 숨어 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삐삐 이야기인가, 여길 수도 있겠다. 다름 아닌 [비스트] 속에 나오는 허쉬파피 또한 삐삐처럼 ‘씩씩한 소녀들’의 계보를 잇는 5살 난 여자아이이기 때문이다.

2. 허쉬파피는 누구?

<세상과 단절된 욕조섬>
세계의 끝자락에 세상과 단절된 ‘욕조섬’이 존재한다. 이 섬은 남극의 빙하가 녹아 땅이 물에 잠기는 걸 막기 위해 쌓아놓은 제방 밖에 있다. ‘허쉬파피’는 욕조섬 늪지 마을에서 병든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이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생각하는 욕조섬 밖 세상은 아주 끔찍한 곳이다.

“저기 참 끔찍하지? 우리 동네가 최고야!" 아빠 말이 저기 제방 너머 마른 땅에선 갓난애들처럼 물을 겁낸단다. 그래서 중간에 담을 쌓았다. 아빠가 그러는데 마른 땅 사람들은 가진 게 없다고 한다. 휴가도 1년에 한 번 뿐이다.

욕조섬 밖 사람들과는 달리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은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 허쉬파피는 야생 상태의 동물들과 함께 늪지대에서 자라 일찍이 세상이 얼기설기 짜여 있는 거미줄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허쉬파피에겐 이 세상이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생명체인 셈이다. 하나가 다치면 결국은 모두가 아프다는 걸 안다.

<늪지대에서 자란 허쉬파피>

우주는 작은 조각들이 맞물린 퍼즐 같다.
아무리 작은 조각 하나라도 잘못되면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다.

허쉬파피는 모든 조각들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우주가 완벽해진다고 믿는다. 어느 날 우주의 균형이 깨지면, 빙하기에 갇혀버린 ‘오록스’가 단단한 얼음 밑에서 깨어난다는 전설도 믿는다.

* 캐스팅 과정 :

<야성의 힘을 가진 소녀>

허쉬파피는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호기심 많고 야성의 힘을 가진 소녀이다. [비스트]는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거대하고 숭고한 세계를 담고 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끌고 갈 어린 소녀가 영화의 열쇠였다.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방과후교실, 학교, 가정집 등을 일일이 방문하며 1년 동안 오디션을 진행했다. 6세~9세 사이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오디션에 참가했고 오랜 노력 끝에 4천 명의 아이들을 검토한 후 허쉬파피를 찾아냈다.

신기하게도 주인공은 영화의 배경이 된 늪지대 인근 지역 출신의 5살 소녀 쿠벤자네 왈리스였다. 쿠벤자네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이 어린 소녀는 풍부한 유머감각과 타고난 카리스마로 만나는 사람마다 매료시켰다는 후문이다.

3. 벤 제틀린 감독이 [비스트]를 통해 던진 화두

비스트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담은 어두운 동화이자, 태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루이지애나의 생활방식에 보내는 희망 찬 러브레터.” -토탈 필름, 게이트스 테이블스-

욕조섬의 배경이 된 공간은 ‘루이지애나 주’이다. 루이지애나 주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오염되었지만 ‘내 삶의 뿌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향이다. 허리케인과 석유유출 사건으로 인해 토지는 병든 지 오래다. 제방에서 제외된 ‘욕조섬’처럼 어느 한 순간 지도에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욕조섬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언젠가 폭풍이 불고 땅이 잠길 만큼 물이 높이 차오르면 욕조섬은 사라지고 물만 남게 되겠지. 그래도 나랑 아빠는 여기 남는다. 우리가 주인이니까.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위기의 순간에 맞닥뜨린 사람들을 보면서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더 이상 삶이 지속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고난을 버텨낼 힘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벤 제틀린 감독은 “허쉬파피야 말로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표상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감독은 어린 소녀를 통해 답을 제시한다. 영화 속 ‘허쉬파피’는 어린 나이지만 터전과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거대한 세상과 홀로 맞선 소녀는 공포의 대상과 맞닥뜨리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고난을 통해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위기의 순간에 나침반이 되어줄 지혜와 용기까지 얻는다.

4. 야성의 소녀들이 가는 곳에 마법이 일어난다

비스트는 “시적이며 놀라운 마법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콜라이더 닷 검, 매트 골드버그-

환상적인 요소와 리얼리즘은 반대 개념이지만, 그 매개가 소녀가 되면 말이 달라진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삐삐가 자신의 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악당들의 엉덩이를 걷어찬 후 지붕 위로 던져버려도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던가를, 또 얼마나 통쾌했던가를. 허쉬파피가 가는 곳에도 마법이 일어난다. 마법은 현실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술적 리얼리즘을 탄생시켰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환상적인 존재는 땅 끝에 발을 딛고 야생마처럼 달리는 허쉬파피가 아닐까!

<"살아남는 법을 배우란 얘기야!">

허쉬파피가 험한 세상과 맞서는 방법 또한 삐삐와 같다. 이 소녀들의 힘은 현실을 긍정하는 상상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 야성이다. 허쉬파피는 고아가 된 삐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러 모험을 떠난다. 역경이 다가올 때마다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살아남는 법을 배우란 얘기야.”

죽음을 앞둔 아버지 앞에서도 허쉬파피는 슬픔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화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다.

누구나 자신을 있게 한 존재를 잃는다. 그게 자연의 섭리라고들 한다. 용감한 사람은 그걸 지켜본다.

5. 통괘한 에너지가 흐르는 소녀들

<아니카, 토미, 삐삐>

토미와 아니카를 기억하는가? 토미는 삐삐를 만나면서 마음속으로 동경은 해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나무타기나 말타기를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었고, 아니카는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맘껏 놀지 못했던 바보 같은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삐삐는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평소에 하지 못하는 일들을 맘껏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였다.

<전설의 존재 '오록스'>

삐삐가 아이들에게 선택할 자유를 일깨워주었다면, 허쉬파피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그 옛날 전설의 짐승 오록스가 가졌던 야성을, 손안에 든 오늘의 작은 조각보다는 거대한 우주의 틀을 보라고. 그리고, 이 씩씩한 소녀는 외친다.

우주는 작은 조각들이 맞물린 퍼즐 같다
깨진 조각을 다시 맞추면 모든 건 제자리를 찾는다.
자, 출발!

신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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